
독일 여행 6일차, 베를린에서는 2일차 아침이다. 벌써 여행이 막바지를 향해 간다는 게 너무 아쉽게 느껴진다.
어제는 베를린에서 현대미술관 위주로 둘러봤다면, 오늘은 박물관과 국립미술관을 중심으로 돌아볼 예정이다. 그리고 알렉산더 광장을 둘러보고 베를린 장벽으로 향할 생각이다. 그래서 숙소 앞에서 공공 자전거를 대여해 박물관 섬으로 향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거리가 애매하게 멀 때가 있어 자전거를 대여해서 이동하는데 그 순간이 정말 행복하다.

베를린에는 ‘박물관 섬’이라는 곳이 있다. 말 그대로 여러 개의 주요 박물관이 한데 모여 있는 문화 지구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정말 하루를 온전히 이곳에서 보내도 될 만큼 방대한 공간이다. 베를린이 어떻게 과거를 보존하고 현재와 연결하는지 보여주는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Altes Museum 베를린 구 박물관

제일 먼저 들른 곳은 베를린 구 박물관이다. 박물관 섬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건축물이라고 한다. 이곳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유물을 중심으로 한 상설 전시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웅장한 기둥이 인상적인 외관처럼, 내부 역시 고전적인 분위기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서자 다양한 조각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괜히 나의 발걸음과 움직임도 조심스러워졌다.

그리고 한쪽에 앉아 무언가에 몰두하고 계신 분이 있어 가까이서 보니, 조각품을 스케치북에 옮겨 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괜히 나의 작은 로망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작업에 집중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리고 책을 읽는 사람이다.

베를린 구 박물관에서 가장 좋았던 공간은 1층에서 위층까지 시원하게 뚫린 홀이었다. 위에서 쏟아지는 자연광과 벽면을 따라 놓인 조각품들이 어우러져, 공간 전체가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사람들은 각자 그리고 싶은 조각품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서로의 그림을 보여주며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나도 저 무리 속 한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장면을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어서 1층 카페에 앉아 잠시 쉬었다가 나왔다.

여행을 하며 어떤 장소를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건, 어쩌면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는 작은 행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공간에 대한 인상은 결국 그곳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태도로 남는 것 같다. 구 박물관에 들어설 때 환하게 인사를 건네주던 안내 직원 덕분에, 이날의 관람은 시작부터 기분 좋게 열렸다.
Alte Nationalgalerie 베를린 구 국립 미술관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으로 넘어왔다. 구 국립미술관은 박물관 섬에 위치한 19세기 미술 중심의 미술관이다. 건물은 고대 신전처럼 높은 계단 위에 세워져 있어, 멀리서 보면 하나의 기념비처럼 느껴진다. 방금 다녀온 베를린 구 박물관이 고대를 보여주는 공간이었다면, 이곳은 근대의 시작을 마주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미술관 건물 내부가 참 좋았다. 입장하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좋았고, 전시를 보는 동선도 흥미로웠다. 동글게 이어지는 구조를 따라 걷다 보면 둥근 방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입구를 지나 층마다 올라가는 중앙 계단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무대 장치 같다.


구 구립미술관은 단순히 작품을 보는 곳이 아니라, 19세기 예술이 머물고 있는 건축 안을 천천히 거니는 경험처럼 느껴졌다. 베를린을 방문한다면 꼭 한 번 들러보길 추천하고 싶다.
Neues Museum 베를린 신 박물관

또 바로 옆에 있는 베를린 신 박물관에 들어왔다.
건물 외벽을 보면 거칠게 드러난 벽돌과 새 콘크리트가 대비되는 질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큰 피해를 입은 뒤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2009년에 재개관한 공간이라고 한다. 그래서 완전히 새것처럼 복원하기보다는, 파괴된 흔적과 새로 보강된 부분이 함께 공존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이 건물은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층위를 고스란히 품은 하나의 역사적 기록처럼 느껴진다.




전시는 고대 이집트 유물과 네페르티티 흉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공간은 조용하고 절제된 분위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화려하다기보다는 묵직하고 차분한 공기가 감돌았다.


Trattoria Pizzeria San Nicola


박물관 섬을 둘러보고 나니 배가 고파졌다. 슈프레 강변을 따라 레스토랑이 늘어선 거리로 향했다. 원래 가려던 식당은 사람이 정말 많았다. 날씨가 좋아 테라스 좌석은 이미 만석이었다.
그래서 바로 옆에 있는 Trattoria Pizzeria San Nicola로 들어갔다. 옆 가게보다 손님도 적고 리뷰도 많지 않아 조금 걱정했지만, 그냥 믿고 들어가 보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알리오올리오를 주문하고, 이름만 보고 감으로 샐러드 하나를 추가했다. 그런데 나온 건 토마토와 생양파가 단순하게 담긴 접시였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 싶었지만, 먹다 보니 은근히 중독성 있었고 알리오올리오와도 잘 어울렸다. 파스타도 맛있었고, 강변을 바라보며 햇볕을 쬐며 식사하니 행복했다. 평점에 너무 연연하지 않은 것도 좋은 여행 같다.

주변 일대를 천천히 걸으며 구경하다가 젤라또 하나를 사 먹었다. 그리고 다시 자전거를 대여해 텔레비전 탑이 있는 알렉산더 광장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에 오기 전 6GB 유심을 구매했는데, 그걸 다 써버린 것이다. 자전거는 앱에서 반납 버튼을 눌러야 종료되는데, 데이터가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시간은 계속 흐르고,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eSIM을 구매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자전거를 끌고 다니며 공공 와이파이를 찾아 이리저리 헤맸다. 그러다 잠깐 신호가 잡힌 곳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베를린 투어 버스 앞이었다. 그 앞에서 잠시 와이파이를 빌려 쓰고 급하게 eSIM을 추가 구매한 뒤, 겨우 자전거를 반납할 수 있었다.
Berliner Fernsehturm 베를린 텔레비전탑

베를린 텔레비전탑은 독일 베를린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알렉산더 광장에 자리하고 있다. 도시 어디에서나 시야에 들어올 만큼 높이 솟아 있어 방향을 잡는 기준점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텔레비전탑 바로 옆 알렉산더 광장으로 걸어가 보았다. 이곳은 내가 베를린에서 본 곳 중 가장 사람들로 붐비는 공간이었다. 광장 한쪽에서는 랩을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는데, 단순한 길거리 공연이라고 하기엔 수준이 상당했다. 에너지가 굉장한 곳이었다.
TK Maxx





그리고 아주 도파민이 터지는 재미난 장소를 발견했다. 알렉산더 광장으로 가는 길에 대형 쇼핑몰이 있었는데, 큼지막한 할인 배너가 눈에 들어왔다. 뭔가에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갔고, 그곳에는 수많은 옷들이 행거에 빼곡히 걸려 있었다. 알만한 브랜드들도 보였고, 가격은 생각보다 훨씬 저렴했다. 반팔 티셔츠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도 하고, 해외에 오면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디자인과 프린팅이 많아서 나도 모르게 열심히 옷을 디깅하고 있었다. 다행히(?) 피팅룸이 있어서 입어볼 수 있었는데, 막상 입어보니 생각보다 별로인 것들도 있어 몇 개는 다시 내려놓았다. 입어볼 공간이 없었다면 아마 더 많이 샀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이름은 TK Maxx. 다음 날 한 번 더 가볼까 했지만, 아쉽게도 일요일은 휴무라 다시 들르지는 못했다.


BLESS

그리고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이곳에 온 목적은 BLESS라는 편집숍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독일에서 작업할 때 자주 들르던 곳이라고 해서, 베를린에 오면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이곳을 오래 기억하게 된 이유는 단순히 물건 때문만은 아니다. 스토어의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고, 진열된 제품들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디자인들이었다. 알고 보니 이곳은 단순한 상점이 아니라, 주인이 실제로 거주하는 집을 낮 시간 동안 잠시 개방하는 공간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가게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아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초행길이라 건물을 찾는 데 조금 헤맸다. 이 집 저 집 계단을 오르내리다 겨우 발견한 작은 BLESS 간판.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기록으로 남기지는 못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다. 슬리퍼로 갈아 신고 방 안을 둘러보니, 옆에서 공간과 브랜드에 대해 설명해주며 자연스럽게 스몰토크도 이어갔다. 무엇보다 공간이 정말 감각적이었다. 과하게 꾸미지 않았는데도 취향이 또렷하게 느껴졌고, 그 안에 놓인 물건들은 하나하나가 작은 오브제처럼 보였다.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독일에 와서 한국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을 마주쳤다.
do you read me?!



여행을 가면 국내든 해외든 꼭 한 번은 들르게 되는 곳이 있다. 바로 독립서점이다. 이번에는 do you read me?!라는 서점을 찾아왔다. 이름부터가 귀엽다. 서점 안에는 정말 많은 아트북이 진열되어 있었다. 큐레이션도 잘 되어 있었고, 아마 내가 가본 서점 중 디자인 서적이 가장 많았던 공간이 아닐까 싶다. 한쪽에 서서 책을 하나씩 넘겨보며 천천히 구경했다. 사고 싶은 책도 많았지만, 여행 중이라 마음만 담아두었다. 이곳에서는 에코백도 많이들 구매해 간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사장님의 모습이었다. 편안한 차림이었지만 자연스럽게 멋이 느껴지는 스타일. 괜히 나의 롤모델 같은 느낌이 들었다.
Berlin Wall Memorial

그리고 Berlin Wall Memorial에 들렸다.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지나온 시간을 가장 직접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장소였다. 조용한 공간이지만, 그 안에 담긴 역사는 무겁게 다가온다. 베를린에 온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라고 생각한다.




Magic John’s Pizza



그리고 숙소로 돌아가기 전, 유명한 테이크아웃 피자집에 들러 포장을 했다. 굉장히 힙한 분위기의 가게였다. 이미 잘 알려진 곳인지, 앞에는 주문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옆에서는 서서 바로 먹는 사람들도 보였다. 피자를 고이 들고 숙소로 돌아왔지만, 살짝 식어 있었다. 한 조각쯤은 그 자리에서 바로 먹고 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미래지향적이고 현대적인 베를린의 모습을 보았다면, 오늘은 그 도시의 역사 속으로 잠시 들어갔다 온 기분이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니 베를린이라는 도시에 한 발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다시 돌아가고 싶다. 베를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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